VOLUME II · UNIT IV · LESSON 03

왜란과 호란

1592년 4월, 부산 앞바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함대가 나타났다. 7년의 임진왜란, 그리고 40년 후 청 태종의 병자호란. 두 차례 전란은 조선의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LEARNING GOAL성취기준
9역11-03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병자호란의 전개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고,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이해한다.
SECTION · 01

임진왜란 — 7년의 전쟁 (1592~1598)

100년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명을 칠 길을 빌려달라며 조선을 침공했다. 부산성 함락 후 20일 만에 한양 함락 —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 (1592.7.8) — 학익진 전술이순신이 일본 함대 73척을 견내량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포위·격파. 임진왜란의 분수령.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일본 전국 통일자. 명 정복의 야망으로 조선 침공 — 1598년 사망과 함께 전쟁도 끝.
이순신
이순신 (1545~1598)전라좌수사 → 삼도수군통제사. 23전 23승의 불패 전투 기록.
거북선
거북선 (귀선)판옥선 위에 철판 등을 덮어 적의 화살·포탄을 막고, 사방으로 포를 발사하는 돌격함.

📜 7년 전쟁의 흐름

1592.4.13
왜란 발발 — 부산진 함락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가 부산진성 함락(정발 전사). 20일 만에 한양 함락.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
1592.7.8
한산도 대첩 — 이순신의 학익진
이순신이 일본 함대 73척을 견내량에서 유인 → 학익진으로 포위·격파. 일본 수군의 황해 진입 차단 → 평양에 진격한 일본 육군의 보급 끊김.
1592.10
진주대첩 — 김시민의 분전
진주성에서 3,800명으로 일본군 3만 격퇴. 김시민 전사. 다음 해(1593)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결국 함락 — 의병장 김천일·황진·최경회 등 전사.
1592.후~
의병의 분기 · 명군 참전
곽재우(홍의장군)·조헌·고경명·정문부 등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남. 명군 5만이 12월에 참전.
1593.2
평양 탈환 · 행주대첩
조명 연합군이 평양 탈환. 1593년 2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 격퇴 — 행주치마 일화. 일본군이 한양에서 후퇴.
1593~1596
강화 협상
명과 일본 사이 강화 협상. 그러나 도요토미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
1597.1
정유재란 — 두 번째 침공
14만 일본군 재침입. 이순신은 모함으로 백의종군.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 → 이순신 복귀 → 9월 명량 해전 — 13척으로 133척 격파.
1598.8
도요토미 사망 · 왜군 철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일본군 철수 시작. 11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추격 중 총탄에 맞아 전사 —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행주산성
행주산성 (1593.2)권율이 2,300명으로 일본군 3만을 격퇴.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랐다는 일화.
권율
권율 (1537~1599)도원수. 행주대첩의 주역. 이순신의 든든한 동료.
SOURCE · 이순신의 명량 해전 보고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오늘 명량에서 적선 133척이 우리 12척을 에워쌌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려워하게 할 수 있다 — 지금 우리가 그렇다. (…)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나머지 적선이 물러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했다."

— 이순신 『난중일기』 (1597) — 명량 해전 직전·직후
SECTION · 02

왜란을 막은 3대 힘 — 수군·의병·민중

7년 전쟁에서 조선이 결국 살아남은 데는 세 가지 힘이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 전국의 의병, 그리고 행주치마를 든 민중. 군주가 도망간 자리, 백성이 나라를 지켰다.

NAVY · 수군

이순신의 23전 23승

1592~1598 · 옥포 → 노량

옥포(1차 출전)·당포·한산도·부산포·명량·노량 — 23번 싸워 23번 이겼다. 거북선·판옥선·학익진·일자진. 황해를 봉쇄해 일본 육군의 보급을 끊은 것이 결정적.

🏆 핵심 — 한산·명량·노량
VOLUNTEER · 의병

전국의 의병장들

1592~1593 절정

곽재우(홍의장군·경남), 조헌(금산에서 700명과 전사·충청), 고경명(전라), 정문부(함경), 김천일(전라) 등. 양반·승려·평민이 함께. 유정·휴정(서산대사)의 승병도.

🏆 핵심 — 곽재우·휴정·서산대사
PEOPLE · 민중

행주치마와 민초의 힘

1593 행주대첩

행주산성에서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짧은 치마)에 돌을 담아 군사에게 날랐다. 진주성에서 민·관·군이 함께 농성. 도공·기술자·농민이 일본으로 끌려간 인원만 수만 명.

🏆 핵심 — 행주치마·논개
DEEP DIVE · 이순신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1545~1598)은 단순한 명장이 아니다. 23전 23승의 절대 불패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역경을 이긴 인격이다.

모함과 백의종군(1597) — 원균과 일부 신하들의 모함으로 사형 직전. 정탁의 변호로 백의종군. 그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심.
칠천량 패전 후 복귀(1597.7) — 원균이 14만 일본 수군에 맞서다가 칠천량에서 대패.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남은 배는 12척.
명량 해전(1597.9) — 13척으로 133척을 격파. 이순신은 적장 마다시 등의 목을 베어 사기를 올렸다.
노량 해전 전사(1598.11.19) — 도망가는 일본군을 추격하다 총탄에 맞음.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순신은 동양 최대의 명장이며, 그가 없었다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성공했을 것이다.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순간 군주가 도망간 자리에서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킨 사람이었다." —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의 평가
SECTION · 0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27·1636) — 삼전도의 굴욕

왜란이 끝난 30년 후, 만주에서 후금(청)이 일어났다. 두 차례 침략 —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그리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9번 머리를 조아린 굴욕의 순간.

광해군묘
광해군 (재위 1608~1623)중립 외교로 후금과 명 사이를 균형. 인조반정으로 폐위 → 호란의 빌미.
청 태종 홍타이지
청 태종 홍타이지 (1592~1643)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직접 12만 대군으로 조선 침공.
남한산성
남한산성1636.12.14~1637.1.30 인조가 47일간 농성한 곳. 2014년 세계유산.

📜 두 차례 호란의 전개

1608~1623 · 광해군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임진왜란을 도와준 명 vs 새로 일어선 후금. 광해군은 양쪽 사이 중립 외교. 강홍립 부대를 명에 보내되 "형세를 보아 항복하라"는 비밀 지시. 신하들(서인)이 반발.
1623
인조반정 — 친명배금으로
서인이 정변 → 광해군 폐위, 인조 즉위. 외교 노선을 친명배금(명을 가깝게, 후금을 멀리)으로 전환.
1627
정묘호란 — 1차 침입
후금의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태종)가 즉위. 친명 정책에 분노하여 3만 군사로 조선 침공.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형제 관계로 화의.
1636.4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 · 조선의 거부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 조선이 거부 — 명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입장.
1636.12.14
병자호란 발발 · 남한산성
홍타이지가 직접 12만 대군으로 침공. 인조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 47일간의 농성(추위·식량 부족).
1637.1.22
강화도 함락 · 왕족 포로
강화도가 함락되며 왕족과 신하의 가족들이 포로. 항복하지 않을 명분 사라짐.
1637.1.30
삼전도의 굴욕
인조가 서울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림(三跪九叩頭). 군신 관계 수립, 명과 단교, 소현세자·봉림대군 등 인질, 막대한 공물.
SOURCE · 척화파 vs 주화파
남한산성의 47일 — 두 갈래 의견

"척화파 (김상헌):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의를 지키는 것이 신하의 도리다.

주화파 (최명길): 종묘사직(나라)을 보존하는 것이 먼저다. 명분만 좇다 나라가 망하면 누가 의를 지킬 것인가."

— 남한산성 농성 중 척화파(김상헌)와 주화파(최명길)의 논쟁
SECTION · 04

생각해 보기 —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옳았을까?

5가지 질문에 답하고 종합 결과를 확인.

📊 광해군의 중립 외교 — 5가지 관점

각 질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선택. 5문항 모두 답하면 종합 평가가 나타난다.

Q1.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을 배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
Q2.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전의 의리도 깨야 한다.
Q3.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Q4. 인조반정으로 외교 노선을 친명배금으로 바꾼 것이 호란을 자초했다.
Q5. 남한산성에서 척화파(김상헌)보다 주화파(최명길)의 입장이 더 옳았다.
SECTION · 05

한 줄로 정리하면

핵심 정리

  • 임진왜란(1592~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7년 전쟁. 이순신의 수군(23전 23승) + 곽재우·휴정의 의병 +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격퇴. 한산도(1592) → 행주(1593) → 명량(1597) → 노량(1598).
  • 왜란의 결과: 조선 인구 절반 감소, 일본 도쿠가와 막부 성립, 명의 쇠퇴. 동아시아 질서 흔들림.
  • 광해군의 중립 외교(명·후금 사이 균형)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친명배금으로 전환 → 호란의 빌미.
  • 정묘호란(1627): 형제 관계. 병자호란(1636): 군신 관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7일 농성 후 삼전도에서 항복(三跪九叩頭).
  • 호란의 결과: 명과 단교·청과 군신 관계, 소현세자·봉림대군 인질, 환향녀의 비극. 조선 사회의 깊은 상처 → 효종의 북벌론·소중화 의식.